본문 바로가기

방글라데시 일반정보/역사ㅣ민족ㅣ기후ㅣ교육ㅣ사회

방글라데시 가난, 영국이 만들었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 과정과
방글라데시 가난의 원흉 영국의 수탈 청책을 고발한다.
(긴 글입니다. 찬찬히 읽어보세요. 기독교를 앞세운 영국이 방글라데시에 뭔 짓을 했는지 왜 잘 살았던 방글라데시가 세계 최 빈국으로 전락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1930년 그의 아주 훌륭한 11 권의 책 『The Storγ of Civilization』을 쓰기 위해 세계 여행 중 인도에 왔다.
그는 인도를 돌아보고 인도에 대한 영국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착취에 대해 그의 말대로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차서 이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강하게 규탄하기 위해 과거 문명에 대한 연구를 잠시 접어두었다.
그의 짧은 책 『The Case for India』는 고전으로 남아있는데, 인도에서 장기간의 수치스려운 약탈의 기록에 대한 영국의 아전인수 격의 자기 정당화를 무너뜨리는 연민과 분노가 깊은 공감을 주는 책이다.

그는 “영국의 인도정복은 일개 무역 회사(영국동인도회사)에 의한 고급문명에 대한 그야말로 양심이나 원칙없는 침략이고 파괴였다. 예술에 대해 개의치 않고, 이익에 대해 탐욕스럽고, 일시적으로 혼란스럽고 속수무책이었던 한 나라를 총과 칼로 침략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살인하며 영토를 합병하고, 훔치고, 불법적 약탈과 그리고 ‘합법적’ 약탈의 그 역사를 시작한 것이 이제(1930년 당시) 173여년이 무자비하게 지났다”고 했다.


인도는 무굴제국의 몰락으로 18세기 인도 전역에 걸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소왕국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을 때 영국은 대포의 힘으로 광활한 인도 대륙을 종속시켰다. 영국은 나왑과 모하라자(지방 군주들)를 돈을 주고 갈아치웠고, 이들의 많은 보물을 가져갔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들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특히 1840년대 부터 군주가 후계자없이 사망할때 영토를 합병하는 ‘권리 소멸 정책’을 포함하여 농부들이 대대로 경작해왔던 토지의 소유권을 박탈했다.

영국이 정복했던 인도는 결코 원시적이거나 황폐한 땅이 아니었다. 단연 중세 세계의 반짝거리는 보석이었다. 인도는 유럽의 어느 곳보다 혹은 아시아의 어느 곳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산업과 제조의 국가였다. 인도의 섬유 제품과 정교한 장신구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형태로 깎인 보석들도 그랬고, 온갖 종류 특색과 색깔이 있는 아름다운 형태의 도자기, 자기, 세라믹도 그랬고, 쇠, 철강, 은 그리고 금과 같은 금속을 이용한 섬세한 제품들도 유명했다. 그리고 인도는 세계의 그 어느 곳과도 견줄수 있는 아름다움운 건축물들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기술자들과 공장들이 있었고, 위대한 상인들, 은행가들 그리고 금융가들이 있었다. 가장 큰 선박 제조의 나라였을 뿐 아니라, 세계에 알려져 있던 모든 개화된 나라에까지 육상으로 그리고 해상으로 뻗쳐서 대단한 상업과 무역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사람들이 인도에 왔을 때 발견했던 인도였다.

영국의 경체 역사가인 앵거스 매디슨이 실증했듯이, 18세기 초 세계 경제에서 인도가 차지했던 점유율은 23%였는데, 이는 유럽의 모든 나라를 합친 것과 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떠났을 당시는 3%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떨어질 정도로 완전히 황패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의 수탈이다. 200년 동안 영국이 융성한 것은 인도에서 약탈한 것으로 재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동인도회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회사는 실크와 향신료 그리고 기타 이익이 되는 인도 상품을 무역하기 위해 1600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왕의 인가서를 받아 설립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무역을 위해 인도 해안선을 따라 전초기지나 공장을 설립했는데, 특히 캘커타, 마드라스 그리고 봄베이에 설립했다. 동인도 회사는 자기들의 종업원들과 상거래를 보호할 목적으로 초기에 소규모 사병들이 필요하였는데 이는 훗날 갈등으로 점점 더 분열되었던 인도에서 큰 집단의 군인들을 모집하게 되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 되었던 것은 점점 빠르게 정복의 비즈니스가 되었고, 무역 기지는 요새에 의해 보강되었으며, 상인들은 점점 군인들로 대체되었다.

영국의 첫 대사였던 토마스 로우 경이 1615년 무굴 황제 자항기르의 궁정에서 신임장을 제출할 때, 이 영국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화려한 왕의 발끝에서 탄원했다. 당시 무굴제국은 카불에서 방글라데시 끝까지 걸쳐 있었고, 북쪽으로는 카시미르에서 남쪽으로 카나타카까지 펼쳐 있었다. 그러나 15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739년 페르시아 나디르 샤가 델리를 극적으로 강탈하고 모든 보물을 약탈해 간 이후 무굴제국은 붕괴되었다. 무굴제국의 수도는 2개월이 넘도록 약탈되고 불태워졌다고 한다. 그만큼 크고 거대했다. 금, 은, 보석을 비롯 제국의 금고의 약탈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후 3년 동안 페르시아에서 모든 세금을 없앴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된 인도는 지방의 군주들이 자기들의 지역에서 지배를 확고히 했다.
1757년 로버트클리브의 지휘 아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뱅골의 지배 군주 시라지-우드-다울리를 상대로 우세한 대포와 속임수로 지배하게 되었으며, 클리브는 곧 바로 2백 5십만 파운드의 엄청난 금액을 정복의 전리품으로 영국에 있는 동인도회사로 보낼 수 있었다. 이어 1765년 8월, 동인도 회사는 뱅골, 비하르 그리고 오릿사지방에 있는 자기의 세무관리들을 인도 정부에서 동인도회사로 교체하면서 동인도회사에서 징세권를 발부했다. 일개 국제적인 회사가 사병 조직과 복종하는 군주들을 등에 업고 공식적으로 세금을 걷는 회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인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영국 정부와 의회(영국의 많은 의원들이 동인도회사의 주주들이었다.)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동인도회사는 인도 거의 대부분의 지역으로 지배를 확장했다.

동인도회사는 런던으로부터 임명받은 귀족 출신 총독들을 통하여 행정적인 권한을 도입했고 인도의 상거래를 규제하였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인도사람의 생활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였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부상을 군사적으로 또 해군력으로 도왔다.
또 영국 중앙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을수 있도록 의회에서 입법 활동을 (많은 경우 의회에 있는 동인도회사의 주주들이 발의하였다.) 통하여 지원하였다.
그리고 인도 내의 저항을 극복하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들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서 동인도회사를 지원하는 외교정책으로 도왔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중요한 목적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도의 번성했던 제조 산업의 파괴 위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섬유 산업은 이와 관련된 상징적인 사례였다. 즉, 영국은 인도의 섬유 산업을 영국에서 생산되는 영국의 산업으로 대체하면서, 인도의 섬유산업의 제조와 수출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인도의 원자재를 사용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인도와 전 세계로 재수출하였는데, 인도의 섬유산업에는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나 수동 직기로 짠 인도 직물은 영국에서 많은 수요가 있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가 그들의 첫 공장을 1613년 칼람카라(천 위에 문양을 그려 넣어 염색한 것) 옷감으로 유명한 남쪽의 호다마을 미술리파트남에 설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백년 동안 수동 직기를 사용했던 벵골 직공들은 세계 부유충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직물을 생산했었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유럽인들이 공기로 짠 것 같이 가볍다면서 탐냈던 고운 무슬린(면직물) 생산지로 유명했었다. 18세기 중엽까지 뱅골의 섬유는 여전히 유럽뿐만 아니라 이집트, 터키 그리고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자바,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잘 구축된 무역루트를 따라 수출되고 있었다. 뱅골의 섬유 수출 금액은 1750년대에 연간 약 1천6백만 루피 였던것으로 추정된다. (그당시 환율로 이 금액은 거의 6백만 파운드가 되는데 일주일에 1파운드를 벌면 부자였던 시절에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인도의 섬유 수출은 붐을 이루었다. 그러나 영국 상인들이 권력을 잡은 후 모든 것은 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무자비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가져온 파운드화로 섬유 제품과 실크의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뱅골에서 뜯어내었던 세금으로 지불하는 것을 선호했고, 가격을 지속적으로 낮추었다. 그들은 다른 외국 바이어들을 쫓아내고, 동인도회사의 독점을 구축했다. 그들은 인도 섬유제품의 수출을차단했고, 오래 지속해 오던 상거래의 연결수단을 가로막았다.

영국의 제조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더 나아갔다. 인도의 섬유 제품은 놀랍도록 가격이 쌌다. 너무 저렴하여 경쟁을 할 수 없었던 영국의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도 섬유 산업이 제거되기를 원했다. 동인도회사의 군인들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이들은 일부 뱅골의 직공들의 배틀을 조직적으로 부수고, 더 나아가 직공들이 기술을 쓰지 못하도록 그들의 엄지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결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방글라데 무슬린 직조기술은 완전히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바람의 천을 짰던 무슬린 직조 장인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젠 방글라데시에서 조차도 무슬린은 박물관이나 기념 우표에서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국은 인도의 섬유 제품에 대해 70~80%의 각종 세금과 관세를 부과하여 영국으로의 수출이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 결과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생산된 잉여 직물들을 인도 시장에 팔기 시작하였고 인도 시장에는 무관세로 들어 온 영국의 현대식 공장에서 만든 직물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인도는 완전히 영국의 소비시장으로 전락해 갔다.
인도는 여전히 목화를 재배했으나 대부분 영국으로 보내졌다. 인도는 더 이상 실을 뽑거나 천을 짜지 않았다. 이는 주권을 잃은 결과였다. 그래서 훗날 간디는 물래를 가지고 다니며 실을 뽑는 포퍼먼스를 했다. 영국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천을 짜는 장인들은 거지가 되어 갔다. 이 피해를 가장 크게 받은 곳이 한 때 무슬린 생산의 거대한 중심지였던 방글라데시 다카이다. 무슬린의 유명세를 타고 다카는 1760년대 인구가 4, 5십만명이나 될 정도로 번성했었다. 그러나 영국에 의한 무슬린 생산 금지로 도시는 폐허가 되어가서 1820년대에 다카의 인구는 약 5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세계적으로 부유했던 겐지스강 하구에 자리잡은 다카는 영국의 악날한 정책의 결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도시로 전락해 버렸다.
.
.
.

그러나 다카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섬유와 의류 생산의 중심으로 오늘날 번성해 가고 있다.

작성자 : 이석봉 문화원장
#방글라데시_역사
샤시 타루트 <인도, 암흑의 시대>






KBS 다큐 바다의 제국 3부에 위의 일부 내용이 나옵니다.


[KBS 명작다큐] 바다의 제국 3부 - 뒤바뀐 운명 | 대영제국 산업혁명을 이끈 면직공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