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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 민주주의의 상징인가 이식된 신화인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민주주의의 상징인가 이식된 신화인가

 


20대에 나는 무신론자였고, 이념들에도 관심이 없었다. 

90년대 중반, 건축설계를 좀 더 잘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건축이론을 공부했다. 

건물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중에, 이상하리만큼 건축사진들 속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 건물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이었다. 

이 건물을 파악하기 위해, 설계한 건축가의 글들을 읽어나갔지만 그는 온통 신과 물질에 대한 불편하고 시적인 이야기만 남겨 놓았고 해석의 숙제만 던져주었다. 

이 건물을 직접 본 후에 논문을 쓰겠다며, 1996년에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로 날아갔다. 국회의사당 답사이다 보니 당시 안기부를 통해 방글라데시 당국의 허락을 서면으로 받고 출국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대사관 직원들이 입국심사도 없이 곧바로 자동차가 있는 공항 주차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주차장에서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자동차의 창문을 두드리며 구걸하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을 며칠 답사한 후 곧바로 인도로 향했다. 인도 델리에서는 유명한 이슬람성전 앞에서 팔다리가 잘린 채 구걸하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건물들을 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나는 전과 다르게 ‘사람들’을 자꾸 생각하는 버릇을 얻어가지고 와버렸다. 

한국에 돌아와 이 건물에 대한 형태적인 분석글로 학위를 받았지만, 이 건물을 생각하면, 콘크리트를 이고 지고 날랐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23년이나 걸려 지어진 이 건물의 저 하얀 선들은 무엇인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거대하며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사진 속의 가로등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창이 거의 없고 육중한 콘크리트 표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의 거대함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부 공간에서도 높고 깊은 ‘거리 공간’(발터 벤야민처럼 이 건축가도 내부를 외부로, 외부를 내부로 치환하는 전략을 펼쳤다)을 중심으로 그 웅장함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미국의 유대인 건축가인 루이스 칸이다. 그는 1901년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후, 미국으로 이주해 필라델피아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음악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물질 위에 드리워진 강렬한 빛’을 체험한 후로 그는 건축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 건물이 세워지기까지는 23년이나 걸렸고, 건축가는 건물의 완공을 못 보고 사망했다. 그 이유는 방글라데시 독립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 일대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현 방글라데시 땅은 파키스탄의 일부 주(동파키스탄)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파키스탄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이슬람교라는 종교적인 측면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서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 영역을 지배하면서 동파키스탄은 실질적인 식민지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동파키스탄 최대의 정당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고, 71년 3월 아와미 연맹의 총재 무지부르 라흐만은 독립을 선포한다. 

독립운동 세력들은 인도군의 원조를 받아 서파키스탄과 유혈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같은 해 12월 동파키스탄 전체지역을 해방하고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의 민족운동을 억압하고 이곳을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1962년에 주의회의사당과 여러 시설이 포함된 제 2의 수도를 동파키스탄의 다카에 세우기로 하고, 이 계획안을 미국 건축가인 칸에게 의뢰했다. 

1963년에 칸은 건축주를 만나고 땅을 보기 위해 다카로 날아갔다. 그는 의회의사당을 비롯한 여러 제반 시설들을 설계했다. 그러나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게 되자, 파키스탄이 의도했던 식민지의 수도 계획은 폐기되었고 방글라데시 정부는 같은 자리에 방글라데시의 수도 계획을 칸에게 다시 의뢰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가 독립할 당시에는 이미 국회의사당 건물이 건설되고 있었고, 결국 그 공사는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 건물을 맡으며 파산에 이르게 된 루이스 칸은 1974년에 사망했고, 건물은 1983년에야 완공되었다.



공사가 오래 지속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소용돌이와 연관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건물 전체에 그어진 듯한 하얀 선들에 그 사연이 담겨 있다. 이 건물의 콘크리트는 기계로 타설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기술이 낙후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접 콘크리트를 운반하고, 그것을 거푸집 안으로 쏟아 부으며 작업했다. 

이 콘크리트를 막대기로 다져야 했기 때문에 건물은 막대기의 높이에 해당하는 5피트(약 1.5미터)씩 쌓아 올라가게 되었다. 

콘크리트를 붇고 나면 일단 굳어진 후에 다시 부어나가야 했기 때문에, 5피트 마다 이어치기한 줄눈이 생기게 된다. 루이스 칸은 이 줄눈 위에 대리석을 붙이도록 디자인했다. 

공사과정을 알게 해주는 이 대리석 띠는 빗물이 콘크리트 벽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줄눈을 타고 내려갈 수 있도록 한 조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용적 목적 외에도, 대리석 띠는 건물 전체에 걸쳐 가로 세로로 붙여져 있기 때문에 건물의 형태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내부 공간의 배치를 겉으로 드러내주는 역할도 한다. 

높이 방향으로 부착된 대리석 띠의 간격은 건물 층고의 절반(1.5미터) 높이에 해당한다. 건축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대리석 띠는 장식적 물질이다. 이 대리석 띠는 이음새를 감추면서도 그 이음새의 존재를 부각시켜주는 요소다. 

이 대리석 띠는 저물어 가는 태양의 재촉을 받고 빠르게 막대기를 휘젓던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손과 적도의 열기 속에서 콘크리트를 이고 가던 여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새겨진 ‘곳’이다. (이 건축가는 물질을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하나의 장소로 인식했다) 

그리고 파산의 위기에도 이 건물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건축가의 열정을 기억에 담고 있는 것도 이 대리석 띠다.


국회의사당은 실패한 동화인가 아니면 성공한 신화인가?


세워지는 과정(시간)과 내부의 공간을 대리석이라는 물질로 표현해내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간과 구조, 정신과 물질, 빛과 침묵 등의 대립 항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건축적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이 철학의 기저에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라는 그의 세계관이 뿌리 내려 있다. 이 말이 어렵다면, 벽돌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볼 수 있겠다. 

그는 벽돌에 어떤 형태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벽돌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듣는 것이 건축가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동화적 세계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객의 동일시, 즉 인간과 사물이 동일화 되는 것이 동화의 세계다. 그는 죽기 바로 전 해의 한 강연에서, 직업을 바꾼다면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아들인 나다니엘 칸이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영화 <My Architect>에는 칸이 그려준 그림동화가 등장한다. 

첫 번째 화면에 나타난 제목 <THE BOOK OF CRAZY BOAT>에서 CRAZY라는 단어를 이루는 선들은 비뚤비뚤하게 그려짐으로써 CRAZY라는 말의 의미처럼 요동치고 있다. 

이러한 요동치는 단어는 배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역할도 한다. 칸이 그린 이 배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BOOK BOAT다. 

이 ‘책의 배’ 위에 그려진 인물들은 마치 책의 종이 표면 위로 미끄럼을 타는 듯해 보인다. 책은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이자 바다를 여행하는 배처럼, 드넓은 세계라는 또 다른 바다를 알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칸의 건축세계와 작품들을 연구하노라면, 이미 건축을 통해서 그가 모종의 동화를 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건축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역시 동화 같은 특징을 지닌 건물이며, 호수와 다리, 모스크와 계단실, 지붕 등에서 이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루이스 칸은 다카 지역의 우기 때 마다 발생하는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땅을 파서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흙으로 건물의 기초를 다지도록 했다. 

이 결과 건물은 호수로 둘러싸인 채 마치 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이 호수 수면으로 반사되면, 실체(건물)과 허상(반사된 이미지)의 미묘한 병치 현상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점 하나는 입구가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건물을 이루는 여러 덩어리들 중에서 남쪽의 망원경 모양의 덩어리는 모스크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경배를 하는 이슬람교도의 관습을 반영하여 회교 성전인 모스크를 의사당건물에 부속시켜 놓은 것이다. 입구는 이 모스크 아래에 있다. 

이 입구에 이르려면, 벽돌로 만들어진 광장 아래쪽에서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다리를 건너가고 모스크 아래를 지나가도록 계획한 이유는 정치인들이 마치 신성한 건물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의사당에 입성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신성한 마음으로 이끌어 나가길 열망하는 동화적인, 혹은 유토피아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 모스크 반대편에 있는 입구는 박스형 덩어리로 되어 있고, 문이 없는 두 개의 거대한 벽만이 서 있다. 이곳은 계단실이다. 

모스크와 규모는 비슷하지만, 그 안에는 계단과 거대한 벽만 있다. 중요한 종교적 공간과 보잘 것 없는 이동 공간을 동일한 위상으로 다룬 것이다. 실용주의적 차원에서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계획이다. 

중앙에 있는 팔각형 모양의 덩어리는 본회의장이다. 이 본회의장의 천장은 엄브렐라 구조, 즉 우산모양 구조를 이룬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빛이 물질로 이루어진 구조체에 의해 주조되어 오묘한 빛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그가 파산 상태에서도 이 건물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쓰려 했던 건축적 동화를 완성해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영화 <My Architect>에서도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장소로 설정됨으로써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그려지고 있다. (평생 동안 칸은 아들의 존재를 숨기며 살았다) 

칸은 ‘현실에서 동화를 제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가치 있는 현실은 동화에서 발견된다’던 자신의 말을 지켜내려 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미메시스의 장인 동화의 세계를 강조한 벤야민을 떠올리게 만든다. 벤야민은 “동화는 신화가 우리들 가슴에 가져다준 악몽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인류가 마련한 가장 오래된 조치방안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187쪽)”고 했다. 

유대교적인 전통을 지닌 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동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에는 어떤 공유되는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실패한 동화이거나 기껏해야 성공한 신화일 뿐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에는 빈민이 넘쳐나지만, 이곳의 국회의사당은 현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이다. 

국민들에게 이 건물은 유명한 관광지이며, 이들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의사당 주변을 둘러보기도 한다. 이 건물이 방글라데시에 민주주의를 심어주었다는 생각이 국민들에게 이식되어 있다. 

이 건물이 60년대 당시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도구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일반 대중에게 국가 권력기관의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그 기관의 건물 역시 숭상하게 만드는 전략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다. 이 건물에 대한 적절한 평은 어쩌면 만푸레도 타푸리의 주장에서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유물론적 건축사가다. 타푸리는 로버트 벤투리의 건축과 루이스 칸의 건축을 미국적 신화가 만들어 낸 동전의 양면으로 평가한다. 

전자는 천박한 대중성을 자청한 미국 포스트모던 건축의 대부이며 후자는 현상학이나 존재론의 시각에서 분석되는 건축가다. 타푸리에 따르면, 미국문화를 움직여 나가는 이 천박함과 형이상학은 제퍼슨의 미국이 잉태한 쌍둥이며, 주객의 일치를 외친 칸의 건축 세계는 미국적 ‘신화’ 중 하나일 뿐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축의 종말’을 주장한 타푸리의 잣대에서 모든 건축은 사회와 공모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의 매체로 이해된다. (Manfredo Tafuri, 1987, "The Ashes of Jefferson", in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The MIT Press, p.294) 하지만 칸에게 국회의사당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여러 난국에도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건설을 밀고 나간 이유는 그 건물이 새로 탄생한 국가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방글라데시 건국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확하고 실증적인 분석이 있은 후에야 이 건물에 대한 판단이나 감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 건축가의 죽음이 단순한 심장마비 때문이었는지도 역사가들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


그들 그리고 우리는 이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4월 24일에 방글라데시에서는 의류공장이 무너지는 대형 참사가 있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고, 방글라데시의 노동환경이 국제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으며, 방글라데시에 공장을 둔 다국적 의류업체들이 이미지의 타격을 우려해 대거 철수를 고려중이라는 보도가 한창이다. 한편 같은 달 30일에는 아와미 연맹 소속인 최초의 여성 국회의장이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5월 들어서는 1971년 당시 3백만의 사람들을 사살하고 수천 명의 여성들을 성폭행한 파키스탄 군대에 동조한 전범재판 때문에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일고 있다. 왜냐면 사망선고를 받은 이 전범 중에는 이슬람 성직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전범 재판을 꾸린 장본인은 아와미 연맹을 이끈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 하시나 총리다. 1971년 정권을 잡은 좌파적 성향의 아와미 연맹은 전쟁으로 인한 불안한 국내 정세와 낙후한 경제를 바로 잡기 위해 애초의 민주적 행보를 접고, 1974년부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로 돌아서게 된다. 

1975년에는 CIA가 개입된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 와중에 무지부르 라흐만과 일가족이 살해된다. 영국에 있었기에 참극을 피해 살아남은 자녀가 하시나 총리다.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루이스 칸은 1974년에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온 직후 뉴욕의 한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지만, 사망 당시 여권에 신원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지워져, 3일이나 그의 사체는 무연고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자랑하는 대표 건축가의 신원 파악이 곧바로 되지 않았다는 점만 해도 이 죽음은 의문을 던져준다. 독립을 이루며 공화국을 탄생시킨 이들에게는 국회의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상징적이며 실질적인 중요 과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은 그 반대의 입장을 지녔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여러 사태들을 2008년 정권을 다시 잡은 아와미 연맹의 세속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종교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갈등의 그 깊은 골로 내려가면, 영국 제국주의의 잔재, 파키스탄과 인도의 알력, 미국의 간섭 혹은 비밀스러운 지배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글에서, 직물제품으로 유명한 인도 도시들의 쇠퇴를 지적하며, 그 도시의 예로 다카를 든다. (마르크스 선집, 415쪽) 그에 따르면 대영제국의 면사가 인도 시장을 장악할 때 다카 인구가 15만 명에서 2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경제적 기반을 잃은 도시는 영국에서 독립한 후 파키스탄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투쟁을 통해 이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처절한 폐허 위에서 일어서야만 했다. 

그들이 독립을 이룬지 40여년이 흘렀다. 아직도 방글라데시는 무언가의 쇠사슬에 묶여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비단 방글라데시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일어섰던 이들도 다시 무너지게 만드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동화를 꿈꿀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고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바닷물에서 왜 짠맛이 나는지 알려 주는 구연동화가 있다. 

아주 오랜 전부터 지금까지 어느 맷돌이 바다 속에서 소금을 한 없이 뿜어내기 때문이다. 

자! 소금이 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지독하게 짜다 못해 독보다도 쓴 소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옆에서 스러져 가는 한 사람을 지켜내는 일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의 대리석 띠를 이루는 것은 수없이 많은 대리석 조각들이다. 

거창한 유토피아를 꿈꾸기보다는 우리 하나하나가 지독한 소금기로 무장한 대리석 파편이 되어, 이 세상을 아로새기는 선들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마저도 불가능한 동화인가? 

절망하는 습성은 저들이 가르쳐 온 것이고, 저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료출처 : http://www.themir.net/archives/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