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글라데시 일반정보/역사ㅣ민족ㅣ기후ㅣ교육ㅣ사회

방글라데시는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유라시아 견문] 대분할 ⑥ : 방글라데시 : 역(逆)근대화

다카 : 혁명 도시


이병한 역사학자


방글라데시는 혁명 국가였다. 68 혁명이 산출한 유일한 현실 권력이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표방했다. 일괄 '인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국명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이라 했다.

더불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였다. 종교적인 근대 국가를 표방한 파키스탄과 척을 졌다. 종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신생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파키스탄 건국이 1947년이고, 이스라엘은 1948년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는 성/속 분리, 정/교 분리를 공식화했다. 이슬람이라는 보편 문명 대신 민족 문화를 앞세운 것이다. 파키스탄의 펀자브와도 다를뿐더러, 인도의 서벵골과도 차별성을 지니는 '고유한 민족성'을 창달해야 했다.


다카가 대타항으로 삼은 것은 콜카타이다. 콜카타는 영어 교육에 익숙한 엘리트주의의 산실로 지목했다. 브라만주의의 유산도 남은 힌두 도시라고 폄하했다. 반면 다카는 '혁명 도시'였다. 민중주의, 인민주의, 토착주의를 강조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유산은 모두 기각시켰다. 전자는 봉건주의로, 후자는 제국주의로 배타했다. 오로지 벵골 민족주의만을 높이 기렸다. 1906년 타고르가 지은 "My Golden Bengal"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삼았다. 제국에서 국가로, 보편 문명에서 민족주의로, 전형적인 서구형 근대화의 궤도에 올라탄 것이다. 

곧장 국어 공정과 국사 공정이 개시되었다. 페르시아도 영어도 우르두어도 공론장에서 사라졌다. 벵골 어의 기원인 산스크리트 어마저 배척당했다. 벵골 어 전용론이 득세했다. 국사는 단연 민족 해방사로 채워졌다. 영국 제국주의, 힌두 근본주의, 파키스탄 패권주의에 맞서 싸운 '100년의 고난'을 영웅적으로 기록했다. 벵골 어 운동을 주도한 문인들과 전쟁을 이끌었던 군인들을 주인공으로 위인 전기도 편찬했다. 

남아시아 현대사도 바로 세우려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1947년을 분기점으로 삼는다면, 방글라데시는 1971년을 획기로 친다. 1971년 전쟁 또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아니라, '방글라데시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부른다. 1971년에 가서야 남아시아에 잔존하던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세 개의 독립 국가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법을 '탈식민주의적인 도전'이라며 열변하는 다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앞에서 나는 대놓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분명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복합성을 이해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더라도 아무리 곰곰 따져보아도 20세기 남아시아의 획기는 1947년인 것 같다. 1947년의 대분할이 없었다면, 1971년의 소분할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 국가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많은 제3세계 신생 국가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처지는 더욱 엄혹했다. 1971년 전쟁으로 1947년 이후 건설된 사회간접시설마저 죄다 파괴되었다. 다카 대학교 학생을 비롯한 고급 인력의 손실 또한 막대했다. 서벵골로 피난 간 사람들 가운데 살길이 막막한 이들만 방글라데시로 귀환하고, 재력과 학력을 갖춘 이들은 콜카타에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방글라데시의 지도자들 또한 국정 운영에 미숙했다. 동파키스탄 시기 중앙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탓에 훈련과 숙련이 모자랐다. 거버넌스는 부실했고, 민간 역량도 부족했다. 자연이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다. 1974년 대홍수가 난다. 대기근이 잇따랐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파키스탄 시절과 비슷한 경험이 이어진다. 군부가 나섰다. 1975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얄궂게도 1970~80년대 방글라데시의 궤적은 1950~60년대 (동)파키스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규모가 축소된 채 반복되었다. 군부의 무력을 통해서만이 간신히 질서가 유지되었다. 군사 정부가 물러난 것은 1990년이다.


▲ 다카 무슬림. ⓒ이병한



치타공 : 역(逆)근대화 

2016년, 건국 이념 전부가 흔들리고 있다. 사회주의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겠다. 민주주의도 위기다. 선거라는 요식만 남았다. 양대 정당 모두 '봉건적'이다. 각기 다카와 치타공에 거점을 둔 지역 할거 정당이다. 정당 문화도 후지다. 토호들의 가문 정치, 세습 정치가 만연하다. 애초 자본과 노동, 보수와 진보라는 정당 정치가 작동하기 힘든 토양이다.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고, 노동자 계급은 주로 중동에서 일한다. 생활 세계는 압도적으로 이슬람을 따른다.

거버넌스의 부실이 뜻밖의 공간을 열어주기도 한다. 기층 단위에서 비정부기구(NGO)의 활약이 눈부시다. 대표적인 것이 그라민 은행이다. 빈곤 여성을 위한 소규모 융자를 제공했다. 그 창의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벵골은 노벨 문학상(타고르), 노벨 경제학상(센), 노벨 평화상(유누수) 수상자를 배출한 이례적인 지역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관찰하니 과장의 혐의가 없지 않다. 1억6000만 명을 감당하기에는 그야말로 소규모이다. NGO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비정부기구이다. 정부와 생산적인 협업이 이루어질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NGO의 역할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하루 2500원 남짓 수입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해결하는데 NGO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의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방글라데시도 전 지구적이자 동시대적인 현상,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앓고 있다. 민주인가 독재인가가 본질이 아닌 것도 같다. 대다수 방글라데시 인에게 공화정과 군주정, 민주정과 군사정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항만에 배가 들어오고,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지는 않을지언정,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지속될 것이라는 '항상성'이 가장 긴요하다. 진보와 발전이 아니라 항산과 항심을 원한다. 대중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이 예외적으로 지속된 20세기의 매우 이례적인 정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 

부실한 민주주의를 매워주었던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또한 갈수록 모순이 커지고 있다. 당장 제2도시 치타공부터 불만이 팽배하다. 놀랍게도 치타공 시민의 다수는 벵골 인이 아니었다. 복장부터 다카보다는 미안마의 양곤이나 만달레이에 흡사했다. 남자들은 긴 치마 같은 론지를 두르고 있고, 여자들은 얼굴에 흰색 분칠을 한다. 봄맞이 축제도 인도 아대륙의 홀리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송크란을 따른다. 불교도의 비중도 상당하다. 페르시아 세계보다는 만다라 세계에 속해 있던 곳이다.




▲ 치타공 항구. ⓒ이병한



치타공은 항만 도시이다. 예로부터 세계 도시였다. 포르투갈 어, 아랍 어, 아라칸 어, 미얀마 어가 벵골 어와 뒤섞였다. 벵골 만 세계와 인도양 세계의 허브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이 메카로 성지 순례를 갈 때면 중간 항구로 삼는 곳이 치타공이었다. 반대 방향으로는 포르투갈 상인이 남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로 활용했다.

이베리아 반도부터 아라비아 해의 고아(Goa)와 남중국해의 마카오와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연결시켰던 해양 제국 포르투갈도 치타공에 닻을 내렸던 것이다. 이슬람의 문류망과 유럽의 물류망이 이곳에서 교차했다. 바다 사람에게 '벵골 민족주의'는 답답한 틀이었다. 치타공은 열린 세계가 그리웠다. 

그 왕년의 연결망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복구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쫓겨난 무슬림계 소수 민족 로힝야 난민의 거주지가 바로 치타공이다. 치타공에서야 로힝야 족의 계보를 살펴볼 생각이 들었다. 무굴제국과 미얀마 사이에 자리했던 아라칸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인도 아대륙과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연결망이자, 벵골 만 세계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들이 '소수 민족'으로 떠돌이 신세가 된 것 또한 국민 국가와 국가 간 체제가 이식된 '장기 20세기'의 사태이다. 따라서 '민주화된' 미얀마 정권에 소수 민족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빤한 주장만 되풀이해서는 쉽사리 해결될 사안도 아니라고 하겠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사이에서 유연하고 부드럽게 작동했던 '벵골 만 세계'를 복원해가는 집합적 과제와 연동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로힝야 족도 기왕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치타공의 활력 또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힝야 족 난민 캠프에서는 또 다른 글로벌 연결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비정부기구, 종교이다. 종교 단체는 시민 단체보다 훨씬 오랫동안 활약했던 대표적인 NGO이다. 방글라데시 정부 기관이 아니라 이슬람 NGO들이 난민 보호를 이끌고 있다. 이 이슬람 연결망 또한 유구하고 유장한 것이다. 14세기 모로코에서 방글라데시까지 이르렀던 인물이 이븐 바투타였다. 

헌데 사시 눈이 없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연계된 조직들이 푼돈으로 로힝야 족을 테러리스트로 육성하고 있다고 한다. 생거짓말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기왕의 페르시아 문명의 수피즘과는 다른 와하비즘을 전파하고 있음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카에다가 중동과 동남아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방글라데시를 지목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실제로 마지막 남은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 또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재)이슬람화의 물결이 도저하다. 이슬람 난민촌, 이슬람 고아원, 이슬람 구제소, 이슬람 병원 등이 버섯구름처럼 퍼지고 있다. 덩달아 검은 천으로 온 몸을 덮은 부르카 복장의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마드라사, 즉 이슬람 학교의 숫자가 중고등학교의 숫자보다 더 많아졌다는 통계도 있다. 다카 대학교의 그 역사학자는 '벵골 르네상스'를 자랑했던 지역의 고유함과 독자성이 약화되고, 이슬람의 영향이 커지고 있음을 깊이 탄식했다. 문명사가보다는 민족사학자였다.

도시화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민이 유입될수록 가족과 친족, 마을공동체와 같은 전통적 소속감은 상실된다. 고독한 도시인들이 더욱 자주 모스크를 찾는다는 것이다. 다카의 현재 인구는 1500만 명을 넘어섰다. 매년 30만 명 이상이 유입되고 있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 2025년이면 2500만 명의 메가 시티가 될 것이다. 2000만 무슬림이 살아가는 거대한 이슬람 도시가 등장하는 것이다.

정치가 생활 세계의 변동과 무관할 수가 없다. 양대 정당마저 갈수록 이슬람으로 기울고 있다. 기층 사회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이슬람 조직들과 연계해야 표를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이슬람의 입김은 더욱 커져간다. 

세속주의를 고수하는 '구세력'과 이슬람의 귀환을 추진하는 '신세력'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학교이다. 아이들을 일반 학교로 진학시킬 것인가, 이슬람 학교로 보낼 것인가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공립 학교와 마드라사에서 각기 청소년기를 마친 엘리트들이 조우하는 장소는 대학이다. 세계관의 차이가 현저하다. 세속주의 지식인과 언론인이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일종의 '문명의 충돌'이다.

혁명 국가의 쇠락이 비단 방글라데시에 한정된 현상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일개 국가의 일탈이라기보다는 유라시아 전체의 대세이다.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막론하고 재이슬람화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구대륙의 구문명이 再起(재기)하고 있다. 

하여 정보화니 세계화를 서구화나 미국화와 등치시키는 독법은 도저히 통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종교야말로 이슬람이기 때문이다. 1500년의 문명이 최첨단 기술과 뉴미디어와 결합하여 100년의 근대 정치를 잠식해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16억이 소통하는 아랍 어 공론장을 외면해서는 21세기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판단이다. 이 반전하는 역(逆)근대화(De-Modernization)의 풍경과 의미는 이슬람 세계로 서진하면서 더욱 소상하게 따져보려고 한다.


▲ 로힝야 족 난민 캠프. ⓒ이병한








인류세 

다카에서 치타공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거리는 250킬로미터.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다. 웬걸, 장장 8시간이 걸렸다. 직행 버스가 없다. 완행버스이다. 중간 중간 정거장에 섰다. 킨들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군데군데 비포장도로마저 있었다. 교통망이 부실하다. 실은 교통뿐만이 아니다. 전력도 부족하다. 호텔에서도 수시로 전기가 나간다. 인터넷도 깜빡깜빡했다. 석탄과 석유 등 지하자원을 가장 덜 쓰는 나라이다. 태양과 대지와 물, 그리고 인간의 근력에 의존해 살아가는 가난한 나라이다.

어쩔 수 없이 창밖으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망망한 벵골 델타의 풍경을 원 없이 바라보았다. 허리를 구부려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이 보인다. 저들은 3000년 전 조상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는 풍경을 장탄식하며 지켜보는 모습 또한 수백 년째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 중의 하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꼴은 가장 오래된 모습을 지속하고 있다.

내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것은 5월 초였다. 아직은 하늘이 쾌청했다. 몬순이 비를 뿌리기 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6월 첫날에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치타공에서 비가 오고 닷새가 지나면 콜카타에서도 비가 내린다. 그리고 또 닷새가 흐르면 뭄바이에서도 비가 온다. 6월 중순에는 뉴델리를 적실 것이고, 7월 초에는 카라치까지 이를 것이다. 하늘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국경을 가리지 않고 차례차례 비를 뿌려간다. 인도양의 몬순은 수천 년째 반복되고 있는 지구에서 가장 큰 기후 체제이다. 

그 몬순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기후 변동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봄 홍수부터 잦아졌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점점 더 많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몬순 시즌이 되면 바닷물이 영토를 잠식할 정도로 방글라데시는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나라이다. 해수면 상승의 영향 또한 가장 먼저 받지 않을 수 없다. 2030년까지 해수면이 20센티미터 상승하면, 치타공과 그 일대 1000만 명이 위험해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2050년이면 방글라데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식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있다. 벵골 만은 점점 더 넓어지고 벵골델타는 줄어들고 있다. 지구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가이아임을 실감한다.

방글라데시는 인류의 활동이 가이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로 진입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구 온난화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시비비가 이곳 방글라데시에서 판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진위 여부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감사해하지 못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정체(停滯)된 것으로 여기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진보)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 정치가 지속되는 한 임박한 파국을 면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내가 재이슬람화의 물결을 마냥 '퇴행'이라고만 재단하지 않고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근본적 까닭이다.


자출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9622


이병한 역사학자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