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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일반정보/역사ㅣ민족ㅣ기후ㅣ교육ㅣ사회

방글라데시 역사

방글라데시 간략한 역사



가. 고대

선사시대부터 뱅갈지역 (인도의 West Bangal 주 포함)에는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이 살고 있었으나, BC 6세기 경 부터는 인도 등지로부터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곳곳에 섞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까운 티베트, 미얀마 등지로부터는 터어키족, 몽고족등이 이주해와서 종족간의 혼혈이 이루어졌으며, 뱅갈인이 형성되었다. BC 5세기 중엽부터 뱅갈지역 (브라마트라강 서쪽지방)은 마가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어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로 이어지면서 불교가 이 지역에서 크게 교세를 떨쳐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다. 그러나 AD 4세기 굽타왕조가 인도를 재통일 하면서 부라만 교를 국교로 정하여 불교가 일시 쇠퇴하였으나 AD 8세기경 팔라왕조가 성립되면서 불교는 비로서 전 뱅갈지역에 퍼지게 되었다.

 


나. 이슬람 시대

1204년 회교도의 침입으로 팔라왕조가 멸망하고, 터키계 고리왕조가 성립되면서 터키계 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왔다.
1576년 무갈 왕조의 아크바르 대제가 뱅갈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영국식민통치와 대체될때까지 무갈왕조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무갈왕조의 아크바르대제는 행정기구를 중앙집권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토지의 사유를 금지하고 왕이 전토지를 소유하면서 궁정 회교귀족에게 하사하였으며, 귀족들은 기존의 카스트제도를 이용하여 토지를 지방호족(힌두교도)에게 세습적으로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궁정 회교귀족을 중심으로 문화가 번성하였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과 상공업의 발달은 도시 기술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했으며, 비회교도에 대한 인두세가 부과되는등 차별정책이 시작되자, 카스트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교에게로의 개종이 시작되어 오늘날 회교국의 계기가 되었다.

 


다. 영국 식민통치 시대

1600년 영국의 인도 통치가 시작된 이래 1757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에 따라 영국은 뱅갈지역을 포함한 인도 전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1773년부터 총독에 의한 영국의 직접통치는 회교도들에 의한 등용의 차별(힌두교도 우대) 정책과 경제 수탈 정책으로 뱅갈 지역의 회교도들은 영국인과 힌두교도의 이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농촌은 황폐화 되었다. 1815년 이래 영국으로부터 기계와 면제품이 수입됨에 따라 한창 번성하던 면공업도 완전히 파멸하였으며 이를 대체할 수출품 생산을 위해 쥬트와 차 재배가 도입되게 되었다. 19세기 초엽부터 반 힌두교 성격이 강한 회교 부흥 운동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회교 엘리트들의 반 영국운동으로 바뀌어 뱅갈 지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2차대전의 종료와 함께 종교적인 공통성이란 이유로 뱅갈지역은 파키스탄의 1개주인 동파키스탄으로 1947년 8월24일 독립하였다.

 


라. 동파키스탄 시대

종족, 언어 및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동/서 지역이 한나라로 독립되고, 서파키스탄 정부의 동파키스탄에 대한 경제포탈, 문화종속, 정치적 압제 등의 차별정책이 심해지자 저항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 동파키스탄의 저항운동은 1952년 "뱅갈어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948년에 파키스탄의 까이디.아좀 대통령이 동파키스탄도 서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58년에 중앙정부가 주정부를 해산하고 대통령의 직접 통치하에 두어 아유브.칸 장군의 군정에 의한 통치와 1962년 퇴역한 후 선거를 실시하여 형식상의 민정통치를 하였으나 이에 대한 뱅갈인들의 거족적인 데모(1965년에 일어난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 후 66-68년 3년동안 독립운동이 무척 강했었다.)로 결국 1969년 10월 이야히야.칸 장군에게 정권이 이양되었다. 1970년 11월 총선에서 동파키스탄 분리를 주창해 왔던 아와미연맹당의 압승으로 중앙정부의 국회개회 무기한 연기에 대항하여 '셐 모지불 라만' 당수가 전면 파업과 함께 1971년3월26일 아침 치타공방송국을 통해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동.서지역의 대립은 결국 내전화 되고 말았다. 이러한 동파키스탄 독립운동을 중앙정부가 무력으로 강제진압하려 하였으나, 동년 12월3일에 인도의 참전으로 실패하고, 마침내 1971년 12월16일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국호로 독립하였다.

 


마. 방글라데시 탄생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동서 파키스탄에는 종족, 언어 및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의 존재로 인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파키스탄 역사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동서 파키스탄의 관계는 이전의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대립 관계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동서 파키스탄 사이의 갈등은 1970년 12월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창해 온 섹 무지불 로허만(Sheikt Muiibur Rahman)의 아와미 연맹(AL)이 동부 지역에서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1971년부터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섹 무지불 로흐만은 체포되었고 아와미 연맹도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자 섹 무지불 로흐만의 추종자들 및 천만 명 이상의 피난민들과 망명자들이 인도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임시정부를 창설하였다. 1971년 3월 26일 방글라데시는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1월 말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에서 인도와 벵골 연합군은 곧 동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파키스탄 군대를 물리치고 현재의 방글라데시가 된 동파키스탄 지역의 통제권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은 9개월간의 독립 전쟁을 치른 끝에 1971년 12월 16일 독립 주권 국가로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였다.

 


바. 봉고본두 섹 무지불 로흐만 정권(1972~1975년)

독립 후 1972년 1월10일 아와미리그의 '모지불 라만(색 하시나의 아버지)' 당수가 귀국하여 잠정 헌법을 선포하였다. 라만은 A.S. 쪼드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자기는 수상으로서 국방. 내무. 공보상을 겸하고, 사회주의 경제방식과 비동맹 중립노선을 견지할 것을 선언하였다. 라만은 취임 당시 국민들에게 3개월 이내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져 갔다. 이에 따라 그는 농산물과 기타 일용상품 분배에 실패해서 엄청난 물가상승과 극심한 인플레를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했었다. 1972년 12월 헌법제정에 이어 1973년 3월에 실시된 최초의 총선에서 모지불 라만이 이끄는 아와미리그가 압승하여 라만체제가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러나 1973년 석유파동과 1974년 가뭄으로 인한 기아사태 등에 의한 경제의 혼란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겹쳐, 야당에 의해 주도된 반정부 시위활동으로 국내치안이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4년12월말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5년 1월 대통령 중심제로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여,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노동자·농민 아와미 연맹(BAKSAL)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체하였다. 이것은 방글라데시의 정치 발전을 저해하였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희망과 열망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약속한 정부 개혁도 지지부진하면서 봉고본두 대통령은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75년 8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봉고본두 대통령은 일가와 함께 피살되는 불운한 종말을 맞았다. 봉고본두 일가 중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어서 쿠데타 현장에 없었던 딸 섹 하시나(Sheikh Hasina)와 레하나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 지아울 라흐만 정권(1975~1982년)

봉고본두 대통령의 피살 이후 쿠데타와 반쿠데타가 계속 발생하여 정국 혼란은 악화 일로를 거듭하였다. 그 와중에 1975년 12월 '지아 우르 라만(부인 : 칼레다 지아)'장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1977년 4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1981년 5월30일 암살당하였다. 지아울 라흐만 대통령은 1978년 9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angladesh Nationalist Party ; BNP)을 창당하여 30개 이상의 정당이 참여한 1979년 2월 총선에서 전체 의석 300석 가운데 207석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1981년 3월 봉고본두 초대 대통령의 딸인 세크 하시나가 귀국하여 아와미 연맹 당수에 취임하고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81년5월 30일에 군부 내의 불만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지아울 라흐만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아. 엘샤드 정권(1982~1991년)

1982년 3월 당시 육군참모총장 엘샤드(ERSHAD)중장이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계엄령하에 통치를 계속하였으며, 1986년 5월7일 민정이양 첫 단계로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여 집권여당인 쟈띠오 파티당(JATIYA PARTY)이 압승하였다. 이에 엘샤드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과 국민생활개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졌다. 몇 번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홍수, 인구증가, 문맹 등 문제들이 잡혀 나아가기 시작했다. 평화적인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개발프로그램들이 뱅갈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6년 10월 15일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엘샤드가 대통령에 당선, 1986년11월10일 계엄령을 철폐하였다. 1987년 11월 11일-26일(17일간) 야당측은 엘샤드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대정부 강경투쟁 '다카 포위 프로그램(DHAKA SIEGE PROGRAM)'을 벌이자 정부는 1987년 11월27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87년 12월 6일 국회를 해산하였다. 1988년 3월3일 정부는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여 여당인 쟈띠오파티(JATIYA PARTY)가 83% 의석(300석중 250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동년 4월 25일 국회개원과 더불어 비상사태를 해제하였으며, 4월 28일 개각을 단행하였다. 1989년 7월 대통령임기 5년으로 1회 연임가능, 부통령은 국민투표로 직접 선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으나, 야당연합 주도의 정권퇴진운동으로 1990년 12월 6일 엘사드 대통령의 하야 후 JATIYA PARTY정권이 붕괴하였다. 1990년 12월 7일 전임 대법원장 샤하붇딘이 야당연합의 추천하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총선에 의한 신 의회 구성 및 민선정부에 권력이양을 약속하였다.

 


자. 칼레다 지아 정권 제1기(1991-1995년)

1991년 2월 방글라데시 최초의 실질적 자유 경선을 통해 집권한 BNP의 칼레다 지아 총리는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민주화를 저해하는 최대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같은 해 9월 개헌을 단행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내각책임제를 부활시켰다. 이는 1975년 봉고본두 초대 총리가 대통령 중심제를 실시한 이래 16년 만에 내각책임제로 복귀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비스와스(Abdour Rahman Biswas)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의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장 경제를 강화하는 경제자유화 조치를 추진하여 외자 유치를 포함한 투자 확대를 도모하는 등 여러 가지 경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칼레다 지아 정부는 국정 운영 미숙, 경제 사정 악화, 부정부패, 노동 파업 빈발 등으로 야당과 반정부 세력으로부터 정치 공세를 받았다. 특히 제1야당인 아와미 연맹이 1994년 3월 실시된 국회의원 보귈 선거를 관권·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칼레다 지아 정권 퇴진과 과도 중립 내각 하에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같은 해 12월 야당 의원 전원(147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함에 따라 정국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야당 쪽의 요구에 대해 칼레다 지아 총리는 1996년 초로 예정된 총선 1개월 전 총리직 사지 및 현직 대통령 주관 하에 총선을 실시한다는 조건적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야당에서 불응하여 여야 대치 정국이 지속되었다. 결국 여야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BNP 정권의 임기가 만료되어 1996년 2월15일 제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에 아와미 연맹 등 주요 야당들이 불참 선언을 하여 투표율은 1991년 총선 당시의 투표율 55%에 크게 밑도는 10%를 기록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거는 BNP의 단독 선거 형태가 되었다. 선거 결과 칼레다 지아 BNP 당수가 총리로 재선되었지만,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연일 계속되는 총파업을 주도하여 BNP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거기에 세계 각국의 지지도 얻지 못한 칼레다 지아 총리는 결국 1996년 3월 30일 총리직을 사임하고 국회도 해산하였다. 이에 비스와스 대통령은 선거 관리를 위해 무함마드 라흐만 전 대법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11인 과도 중립 내각을 출범시켜, 같은 해 6월 여야 모두가 참석한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차. 섹 하시나 정권 제1기(1996~2001년)

공정을 기하기 위해 외국의 선거 참관인 입회하에 1996년 6월 12일 치러 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이던 아와미 연맹이 전체 300석중 146석을 획득하여, 116석을 획득한 BNP를 누르고 제1당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아와미 연맹은 32석을 얻은 제2야당 국민당과 연합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고, 1996년 6월 23일 아와미 연맹 당수인 섹 하시나가 칼레다 지아 전 총리에 이어 방글라데시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취임하였다. 아와미 연맹은 하시나 당수의 부친이었던 봉고본두 초대 대통령이 암살된 이래 21년 만에 정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섹 하시나 정권 역시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해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야당으로 위치가 바귄 BNP에서는 연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일으켰고, 방글라데시의 부정 부패 문제와 경제 문제 역시 근본적이고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려웠다. 결국 2001년 새로 치러 진 총선에서 아와미 리그는 정권을 다시 BNP에 넘겨주어야 했다.

 


카. 칼레다 지아 정권 제2기(2001~2006년)

2001년 총선 결과 BNP가 이슬람 부흥주의 정당인 자마티 이슬라미(Jamaat-e-Islami), 에르샤드 전 대통령이 세운 국민당 등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권좌에 복귀한 칼레다 지아 총리는 사회 기반 시설을 개선하고 경제 발전을 꾀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뿌리 깊은 부정부패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해져 갔다. 방글라데시는 수년 째 부패지수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으며, 야당과 반정부 세력이 주도하는 파업과 테러는 더욱 폭력적이 되어 갔다. 게다가 야당에 반대하는 과격 세력도 야당을 겨냥한 테러를 자주 일으켰는데, 3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2004년 8월 21일 야당 집회 폭탄 테러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6년 10월 27일 임기 만료로 내각이 총 사퇴하고 국회가 해산 되었다.

 


타. 과도정부(2006~2008년)

2006.10월 과도정부 수반으로 Prof. Dr. Lajuddin Ahmed 대통령이 추임을 하여 2007년 1월22일 총선을 발표했다. 그러나 야당은 여당이 엄청난 부정선거를 준비하고 있다며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선거 거부를 선포하였다. 무정부상태에 이르자 군부의 쿠데타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Lajuddin Ahmed 대통령 임시정부 수반이 하야 하고, Fakiruddin이 군부의 지지를 받으며 임시정부 수반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2008년까지 총선 약속과 선거제도 개혁, 부패 청산, 정치 및 정당 개혁과 함께 민생안전에 총력을 기했다. 국민전체에 대한 ID 카드가 없어 선거인 명부가 불분명하여 부정선거가 많았다고 여겨 전 유권자를 대상으로 ID카드 제작과 UNDP의 주관하에 사진 부착식 선거인 명부를 작성 12월 29일 역대 가장 공정한 총선을 치루었다.

 


파. 섹 하시나 정권 제2기(2009~현재)

2008.12.29일 9대 총선을 통해 2007.1월 비상사태선포 이후 23개월 간 지속되었던 임시 과도정부 체재에서 정상적인 민선정부로 복귀하였다. 섹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리그(Awami League)가 총300석 중 230석 을 획득함으로 79%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었다. 지난 2009년 1월6일 섹 하시나는 제12대 방글라데시 총리로 취임하여서 참신성과 청렴성을 갖춘 신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31명의 신임 각료를 임명하고, 경제발전, 특히 부족한 인프라개발은 위해 외국과의 적극적 통상투자 협력과 석탄/가스 개발 및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2014.1.5일 10대 총선이 야당인 BNP가 불참한 가운데 치루어 져서 하시나 총리가 이끄는 아와미리그(AL)가 재집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0년5월18일 한국방문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