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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생활정보/방글라데시 종교 생활

방글라데시의 종교 ㅣ 이슬람교

1. 이슬람 전래

 

7세기에서부터 약 3세기동안의 인도는 외부의 침입이 없이 평화로운 시대였다. 부의 축적으로 생활은 매우 풍족하였으나, 정치 조직은 미약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인도라는 국가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국가정치는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특히, 왕의 이익만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이슬람교도들은 중앙아시아의 통상로를 따라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신드지방을 병합했고, 10세기말에는 펀잡지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1001년에는 술탄 마하멜이란 사람이 이슬람의 대군을 이끌고 전면적으로 인도를 공략하여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후 1192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인도를 완전히 정복하고, 1205년에는 인더스 하구로부터 갠지즈 하구에 이르는 부분을 석권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도에 들어오게 된 이슬람교는, 문화적으로 발전했던 이란에서 성장한 이슬람교로 대부분이 고행에 의한 신인합일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짙은 수피파였다.

12세기에 들어 인도에 이슬람왕국을 세워 계몽운동을 펴며 굳건한 기초를 다진 이슬람교는 13세기 이후에는 인도사회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어 텔리왕조와 무갈왕조를 탄생시켰다.


2.  이슬람교의 역사

방글라데시 이슬람교의 역사는, 곧 인도 내의 이슬람교의 역사와 같다.
nbsp;이슬람교는 인도로 들어오면서 기존해있던 힌두문화와 많은 융합을 이루면서 인도적 문화변용을 이루었다.  
16세기 전반에 무갈제국을 이루어 이슬람교를 주축으로 북부인도를 지배했던 이들은 제3대 악바르황제때 가장 융성하여 이슬람교의 전성기를 맞았다.
악바르황제는 종교적 인격을 강하게 지녔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이렇게해서 외래의 정복왕조가 인도의 토착세력으로서 기반을 굳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후 이슬람교는 힌두교의 베다사상과 불교의 영향으로 혼합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어 상징적이고 예술적으로 변하여 감정과 경험에 치중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들은 치유의 신비요법과 미신, 주술, 비정통적인 관습 등으로 민간생활을 주도하며 대중종교로 확산하였다.
이들은 지역의 관습과 신앙과도 타협하며 인도의 천민층을 개종시켰다.
이렇게 되자 인도에 들어 온 이슬람교 세력은 종교적, 정치적인 세력 중심지와 지리적으로 격리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차차 세속화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8,19세기에 울라마를 중심으로 서서히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힌두교나 불교에서 받은 혼합주의와 미신들의 영향에서 이슬람교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14세기의 이슬람교사상을 침식 당하지 않게 이슬람 신앙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를 재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벌인 자들은 일반적으로 행동주의자, 적응주의자들이었으며 군사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근대화운동으로 번져 서방에 대항하고,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합법적 정부를 세우고자 이슬람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특히 사이드 아마드 칸은 인도의 이슬람교를 영국세력과 연결시켜 인도 이슬람교의 몰락을 막아 보려고 애썼으며,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이슬람교에 도입하려고 하였고, 이에 따라 합리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이슬람교 사회의 정치체제에 위기가 닥치자 좌절감을 경험한 세대의 욕구에 응답하기는 했으나, 급진적이고 감정적인 이슬람 사상에 밀려 났다.

이슬람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한 익발은 이슬람교가 화해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자 인도의 지성주의적인 힌두교 밑에서 이슬람교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는 이슬람교는 역동적이며 창조적 종교이며 공동체적 종교임을 강조하였고, 평등사상의 개종 없는 공동체를 부르짖어 사회참여의 적극성을 띠게 하였는데, 이에 따른 사상이 전체 이슬람교도들에게 확산되어 이슬람교의 정체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익발이 시작한 이슬람교의 국가건설은 이슬람의 결속을 위해 정치운동을 시작했으며,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에 이슬람교도들도 자신의 공화국을 갖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치적,경제적 문제로 다시 동.서 파키스탄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각각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이슬람교의 영향

 


방글라데시에 있어서의 이슬람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다.
그들은 지나치리만큼 동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한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루에도 여러번씩 반복하며 같은 시간에 수백만의 사람이 같은 기도를 외우고 매년 순례의 길에서 만난다.

함께 예배 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순례하는 거대한 공동체인 것이다.
이 이슬람교가 방글라데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한 것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방글라데시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하여 이룩한 이슬람교 국가로서 민족적, 종교적 색채가 강한 나라이다.
파키스탄의 정치적,경제적 착취와의 경쟁 속에서 이들을 단합시킬 수 있었던 것도 지역적, 종교적인 힘 때문이었다.
이러한 힘은 이슬람교를 적극 지지하는 정당이 대부분의 방글라데시 의회의 의석을 차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중동의 산유국들의 막대한 원조는 방글라데시에 대한 압력도 가능케 하여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의 영향은 정치, 경제 및 사회, 문화와 더불어 그들의 한 순간의 삶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엄연히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에서 타종교에의 개종은 목숨을 건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들의 개종은 부모, 친척, 친구로부터의 이탈이며 직장에서의 추방이다.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해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가족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이슬람교는 방글라데시에 있어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