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기독교의 전래
1-1. 카톨릭의 전래
방글라데시의 카돌릭의 전래는 그 역사와 마찬가지로 인도로 소급하여 올라가야 한다. 인도에 카톨릭이 소개되기는 이슬람교가 왕국을 세워 이슬람공동체를 형성해가는 13세기부터라고 하는것이 좋다. 13세기 이전의 카톨릭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13세기 말 이슬람교도들이 카톨릭교회의 수도사들이 중국으로 향하는 길을 막자, 이들은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이때 잠깐씩 인도에 체류할 기회를 갖고 동태를 살피곤 하였다.
1289년에는 교황 니콜라스 4세가 극동에 요한을 사절단으로 파견하였는데, 중국으로 가는 도중 인도에서 전도를 하여 약 100명의 결신자들에게 세례를 준 일을 시작으로 이들은 인도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면서 인도에서의 기독교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1300년이 되면서 프란시스코와 도미니크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이들은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순교를 당했다.
1322년 프란시스코선교사 오도릭 페드레느베는 도미니크 선교사 튷단이 순교한 지방에 방문을 하였고, 1344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2세의 사절이었던 마리노리가 인도를 방문하면서 선교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948년에는 바스코 다 라마 일행이 고아,코친 등의 작은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힘으로 그 곳 주민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요하였다.
1500년에는 프란시스코 선교사 8명, 1503년에는 도미니크 선교사 5명이 들어오는 등, 계속 많은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고아에서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사비에르 선교사는 이그나티우스 로달라와 손을 잡고 아시아 선교의 기반을 세우면서 카톨릭 선교의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는 데, 그는 어부들을 위해 해안에 교회를 창설했고, 세상을 떠난 1552년까지 순회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의 선교의 열정은 다른 선교사와 일반 교인의 신앙에 큰 자극과 격려를 주어 인도 선교의 불길을 일으킨 동기가 되었다.
1601년부터는 아르메니아 상인들과 군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들어와 라호르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웠고, 한 명의 주교가 있기도 했다. 1605년에는 로베르트 노버리가 선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하층민을 상대로 했던 선교방향에서 차츰 상류계급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그는 브라만계급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친근감을 주는 데에 성공하여 브라만계급의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면서 38년동안 600명 정도의 상류계급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성과를 거두었다.
1601년에 라호르에 정착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1700년대에는 무갈의 군대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1750년 이후 그 공동체는 쇠퇴해졌다.
1714년부터 다카에 있던 아르메니아인들도 1781년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고, 황마무역을 시작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이렇게 뿌려진 복음의 씨는 몇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이슬람과 힌두교 사이에서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1-2. 개신교의 전래
포르투갈정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반발은 곧 기독교에 대한 비난으로 번졌고, 포르투갈인에 대한 감정은 기독교선교에 지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 대체하여 진출하기 시작한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 패권다툼을 하면서 이때부터 개신교 선교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인도의 개신교 선교는 덴마크의 프리데릭 4세가 1706년에 그의 관할 지역인 트랑케바르에서 활동할 선교단을 창설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할레선교회에 속한 선교사로서, 할레선교회는 이지겐발크와 플루차우 외에도 5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중에 이지겐.발크는 신약과 구약의 일부를 타밀어로 번역하여 인도 선교의 기반을 다졌고, 그 후 슐제가 1724년 구약을 번역하였다. 슐제는 공용어인 힌두스타니로 성경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교서를 내려 하급 카스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기도 하였다.
1750년에서 1798년까지 루터파의 슈바르츠는 동인도회사의 전속으로 일하면서 선교사들이 박해를 받는 시기에도 탄죠르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개신교 선교는 약간 부진해졌다.
18세기가 되자 이슬람교는 개혁운동을 벌이며 새로운 일을 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다툼에서 영국이 주도권을 쥐게 되자, 1793년에 윌리암 케리가 들어와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다졌다. 윌리암.케리는 디나푸르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했으나, 선교사의 거주문제로 뱅갈의 염료공장에서 일하면서 성경을 37개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신교, 즉 기독교선교는 급속도로 확장되어 갔다.
1813년에는 인도의 감정에 예민했던 동인도회사도 그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선교사의 거주와 활동의 제한을 철폐했으며, 캘커타에는 국교회의 감독교회의 설치가 허락되었다. 이렇게 되자 윌리암케리는 적은 선교사들로는 복음의 확장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지도자 양성을 위해 1819년 세람포르에 신학교를 세웠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1920년에 비솝 칼리지가 개설되었고, 193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더프가 상류사회에 대한 목표를 갖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기관을 세워 영어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 선교전략은 큰 성과가 있었다.
1947년부터의 활동은 소수 부족간에는 전개되었지만, 인도의 독립과 파키스탄의 독립, 그리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분리독립 등 정치와 종교적인 국내혼란으로 선교의 불길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2. 개신교의 확장
2-1. 개신교의 역사
현재의 방글라데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선교는 카톨릭보다 200년이나 늦은 1793년11월11일 윌리암.케리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윌리암.캐리는 1793년에 영국의 최초 해외선교 파송중개소로 1792년에 설립된 침례교선교 협회에 의해 파송되어 뱅골지역에서 사역을 했다. 그리고 1795년에 현재의 방글라데시 내에 있는 디나즈푸르에 침례선교협회 선교지국을 설립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에는 1816년에 선교지국이 개설되었다.
무엇보다도 윌리엄.캐리의 가장 위대하고 지속적인 공헌은 뱅갈어로 성서를 번역한 일이다. 이것은 200년 앞서 들어온 카톨릭 선교사들이 착수하지 못했던 중요한 업적이었다.
거의 200년이 되는 세월동안 침례교선교협회의 사역은 뱅골지역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들 사이에 계속되었다.
이를 토대로 설립된 현재의 방글라데시 침례교연합은 약 2만명의 공동체 회원을 가져 방글라데시의 가장 큰 기독교단체가 되기도 했다.
윌리엄.캐리가 활동한 이래로 다른 여러 침례교 단체들이 계속해서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영국의 침례교 이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침례교선교회가 1882년 사역을 시작했고, 인도 아샘지방 경계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독특한 호응을 얻어 가로침례교 연합을 형성했다.
뉴질랜드 침례교는 1886년에 들어와서 대규모의 기독교 문헌 중개소가 되었고 이들은 모두 침례교연합과 관련을 맺고 있다.
미국의 침례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세계복음화를 목표로 1956년 치타공에 도착하여 복음주의적 교회설립사역을 시작했다. 미얀마(버마)국경에 인접한 방치된 남부지역에서의 의료선교로 그들의 사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스웨덴 침례교선교사들도 사역을 개시하였다.
교회선교사회인 성공회단체에서도 1805년에 사역을 시작하였고, 영국장로교는 1862년 성공회로, 옥스퍼드선교회는 1895년에 들어왔다.
루터교의 사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서쪽 국경지방인 산탈리 부족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기독교신앙에 대해 상당히 호의를 보여 노르웨이,덴마크,미국으로부터 온 여러 루터교회와 선교단체들이 협력해서 선교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웨일즈장로교에 의해 시작된 북동 벵골의 국경지대의 가로족 주민들에게 선교사역을 하기도 하였다.
20세기초에는 오순절교회와 비오순절교회의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오히려 교회단체들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치타공 힐트랙스에 있는 복음주의교회는 여행이 제한된 지역에 있는데, 1918년에 바움으로 알려진 부족단체에서 시작된 북동 인도총선교회에 의해 실행된 선교사들이 사역해서 이룬 결과이다. 이 교회는 독립하여 그들 자체의 관할구와 교회 운영을 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국제적인 선교회는 국제기독교친교회로, 1958년 파키스탄으로 들어와 현재는 방글라데시에서 성경통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970년과 1971년에 이은 폭풍우의 참화와 내전으로 시달린 방글라데시는 세계의 관심을 모으면서 이전에는 선교하지 않았던 나라의 선교단체들로부터도 의료와 구조를 받게 되었는데, 인도선교협회,메노파,구세군,세계기독교선명회,NAE의 세계구조위원회, 의료원조회, 성서와 의료선교협회, 독일의 박애선교회 등이 그런 단체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동정과 관심의 대상이 된 방글라데시는 복음의 어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
내전으로 인한 참사와 궁핍,홍수,폭풍의 재난, 그리고 무지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의 어려움을 돕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호의는 오랫동안 무관심하고 방치되었던 방글라데시에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런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방글라데시에 대한 선교의 열정과 불길이 타올라야 한다.
2-2. 기독교(개신교) 현황
전세계는 방글라데시를 기아,빈곤,그리고 인구과잉의 나라로 생각한다. 방글라데시가 거의 200년동안이나 홍수와 폭풍,기근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자연재해나 전쟁 그리고 기아로 죽은 사람이 150만명이 넘는다.
혹시 풍년이 든다고 할지라도 나라 인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없을 정도이니, 방글라데시의 재난들은 어떠할까 가히 짐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인구는 하루에 6,000명씩 늘어만 가고 있다.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여야만 하는 실정이다.
방글라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여전히 저항적이다. 국가의 공식 종교가 이슬람교로 전체 인구의 8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제활동을 정부에서 중요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는 아직 없는 편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정식입국을 금지하는 등 새로운 장애물이 기독교의 복음선교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기독교는 비뱅갈계 부족들과 소수 힌두계층들 사이에서 좋은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일군들이 부족한 형편이기도 하다. 교회를 설립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며 부족언어들로 번역할 수 있는 사역자를 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방글라데시는 뱅갈인이 98%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비하리 뱅갈인이 8%이며, 그리고 다른 소수 부족민들이 2%가량 차지하고 있다. 이런 주민들은 다시 종교와 계층에 따라 세분화 된다.
방글라데시를 복음화시키려면 이런 부족에 대해 그 특징과 그 집단에 대한 연구를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각 집단들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들은 복음을 받지는 못했으나 대부분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복음에 대해 가장 저항적인 집단은 뱅갈과 비하리의 이슬람교도들이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독특한 사회를 형성하여 왔다. 비록 이슬람교가 평등을 주장하여 계급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에는 아쉬랍(상류층), 아즈랍(평민) 그리고 아르찰(천민)등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도 쿠스틴 같은 지역은 개종자들이 많이 있으며, 성경통신강좌를 원하는 이슬람교도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복음선교에는 고무적인 일이 되고 있다.
힌두교 벵갈인은 모두 25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4계급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계급만을 집중적으로 사역한 선교회는 상당한 성장을 보였으나, 그렇지 않은 교회나 선교회는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면 이슬람교와 힌두교 문화에서 소외당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계를 선교단체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지만 단일 부족이나 계급에 집중하여 그 상황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선교단체나 교회는 큰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다. 특히 부족민들의 선교에 이 전략은 매우 큰 성과를 가져왔다.
기독교단체들은 구제와 개발사업에 적극적이어서 이슬람교국가인 방글라데시정부에서도 기근과 황폐 그리고 재난마다 도움을 베푸는 이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이런 상황이 사라질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지 못한다든지 금,토요일은 정기휴일로 정한다든지 하는 정부의 시책은 언제 기독교선교에 먹구름을 가져올 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주어진 지금 방글라데시 선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그리스도인 숫자는 현재 총인구 대비 0.44%(개신교0.23%,카톨릭0.21%)로 매년3.6%(개신교4.5%,카톨릭2.9%)의 성장율을 보이고 있다. 이중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0.08%밖에 되지 않는다.
간단한 방글라데시의 개신교 교회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 단 |
교 회 |
성인교인 |
최대치교인 |
방글라데시 침례 상하 All in One 그리스도협회 방글라데시 침례협회 가로 침례연합 제칠일 안식교회 복음기독교회 방글라데시교회(성공회) 복음루터교회 장로교 회의 방글라데시복음교회 하나님의 성회 자유침례교(새생명) 세계복음침례교연합 기타(19) |
230 113 242 140 58 61 42 186 84 53 102 56 73 508 |
12000 9000 7281 8740 7000 5995 4620 4590 3360 2050 1350 1030 1600 27462 |
25000 22500 20000 19637 15900 14600 13200 8200 6000 5000 5000 3430 3000 53952 |
계(11) |
1948 |
96078 |
215419 |
복음주의자. 인구의 0.08% 977 2,652
오순절/카리스마틱 0.01% 5,300 14,000
선교사방글라데시 사역 선교사. 50개 단체의 316 (1:366,000명).
방글라데시 파송 선교사. 127(1:1,7000 개신교도) 타9 자118
로마 카톨릭 0.21%, 최대 0.18%, 성장율 2.9%
카톨릭교회 657 112,000 200,000
방글라데시 사역 선교사. 304 (1:378,000명)
카톨릭의 전체교회수는 총657개이고, 신자수는 200,000(세례교인 112,000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 Fellowship)라는 단체는, 1947년에 레도이 사마다르에 의해 시작된 토착교단인데 캘커타로부터 퍼진 뱅골어운동으로 급진적으로 번져 나갔던 때에 형성되었다. 이들은 나마스드라 계급으로 이루어졌다.
순복음계통의 하나님의 성회는 치타공,다카 그리고 쿨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계복음화침례교협회는 선교국가 단일인종의 선교에 힘쓰며, 므루와 띠쁘라부족 사이에서 크게 성장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방글라데시 침례교연합회는 산탈족 복음화를 목표로 성장하고 있으며, 방글라데시 침례교 연합은 나마수드라계급과 빤코부족의 기독교화를 서두르고 있다.
이밖에 옥스포드선교회와 교회선교사협회 그리고 영국장로교 등이 연합하여 한 기관으로 병합한 방글라데시교회가 있으며, 가로부족의 교회로 가로침례교연합회가 있고, 북동부 인도 제너럴선교회에 의해 1918년에 시작된 자립교단으로 바움부족을 완전히 기독교화하고 띠쁘라,크양,카미,빤코 그리고 무르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가 있다.
이들은 모두 방글라데시 기독교협의회를 통하여 교회간의 협력과 전국규모의 구제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통신학교, 구제, 신학교육, 문서발행 그리고 방글라데시 성서공회 등의 연합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방글라데시에는 많은 외국선교회들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단체는 영국침례교회선교사협회이다. 이들은 1793년부터 사역을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교회선교사협회와 복음전파연합협회가 1805년에 들어왔다.
영국의 정책이 종교에 대한 불간섭주의로 바뀐 1813년 이후 영국령 벵갈에 선교사들이 들어가기가 자유로와져서 1947년 영국이 철수하기 이전까지 방글라데시에 들어 왔던 선교기관은 모두 9개였고 그 이후 4개의 선교단체가 더 들어왔다.
현재에 이르러 방글라데시에는 약50여개의 교단 및 선교단체와 약 300명의 선교사들이 있다.
이외에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선교사가 더 있고, 구제.개발단체에 소속된 선교사가 상당수 더 있을 것으로 본다.
최근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까지 정식등록된 NGOs(비정부자원봉사단체)는 총802개이고, 이중에 81개의 NGOs 가운데 427명의 외국인이 장기비자를 받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 얼마나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지, 특별히 구제사역이 아닌 직접적인 복음사역에 관계되어 사역하는 선교사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
방글라데시에 있어서 기독교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에 대한 구제활동 덕분에 호의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선교사들이 형편상 대도시에 몰려있어 복음 선교가 비효율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면서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국경지역의 소수부족들 과 나마수드라 계급이 간과되고 있다.
나마수드라의 많은 마을에서는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고 있지만 파송된 선교사가 부족한 실정에 있다.
다카에 있는 네곳의 성경통신학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 벵갈인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데, 1960년 국제기독교친교회에서 방글라데시 성경통신학교로 알려진 초교파적인 협력전도기관을 설립했고, 1963년에는 영국형제회 단체에서 유명한 엠마오성경연구통신학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성회 선교회에서도 국제통신연구소를 설치하여 사역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단체들의 주된 사역은 물론 복음전파이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 매우 저항적이며 기독교로의 개종을 꺼려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통신학교를 개설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교육에도 힘써 가로침례교연합회는 산탈부족 단기성경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다.
기독교의 구제 및 개발사업은 방글라데시에서 복음전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병원과 약품보급소, 그리고 나병치료소와 가족계획기구가 운영되고 있으며, 아동보호, 농업개발 및 직업훈련 등에도 여러 선교단체들이 참가하고 있다.
문서보급에도 힘을 써 무료로 소책자를 보급하고 있기도 하며, 기독교문서센타에서는 많은 책을 발간하여 팔거나 공급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성서공회의 성경보급량도 크게 증가하였는데 대부분이 벵갈어성경이며, 소수부족 언어의 성경도 구할 수가 있다.
현재 기존의 선교단체에 남아있는 선교사 비자티오가 꽤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국선교사들의 그동안의 실수들과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부정적인 사역들로 인한 약간의 불신감 때문에 한국인선교사들에게 비자티오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꺼려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한국교회의 보다 나은 방글라데시 선교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서구선교사들과 현지 교계 지도자들 사이의 인격적 신뢰를 쌓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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